"십자군 왕국은 마지막 순간에 가장 훌륭한 왕을 만났다.”
이는 문둥이왕이라 불리는 보두앵 4세를 평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가장 훌륭한 왕이었다고 평가되는지, 그리고 왜 문둥이왕이라 불리며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이 인물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십자군 전쟁, 예루살렘 왕국의 배경
앞서 언급된 십자군 왕국은 예루살렘 왕국을 칭하고 이는 십자군 전쟁에 배경을 두고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 성지를 점령하자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가 이를 탈환하기 위해 일어난 전쟁입니다. 진중권은 십자군 전쟁을 '십자가의 이름으로 행해진 침량 전쟁은 당시 지배층의 정치적 야욕, 기사 계급의 물질적 욕구, 순진한 민중들의 헛된 기대가 한데 모여 일어난 거대한 리비도의 분출이었다.' 라고 평했는데 실제로 원정에서 행해진 십자군의 약탈과 살육은 성지 회복은 그저 명목이고 실상은 침략전쟁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왕국은 피로 얼룩진 그 첫 번째 원정의 결과물이었습니다.
1차 십자군의 맹공으로 1099년 6월,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합니다. 원래대로라면 예루살렘은 동로마에 반환되어야 했고 교황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십자군들이 오히려 그곳에 그들만의 왕국을 세우는 일이 발생했으며 그렇게 예루살렘 왕국이 탄생하게 됩니다. 1차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 장군들의 개인적인 정복심, 총사령관의 부재 등의 이유로 4개의 십자군 국가들(에뎃사 백작령,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작령, 예루살렘 왕국)이 자리 잡게 되었고 보두앵 4세(Baldwin IV)는 예루살렘 왕국의 7대 국왕으로 13살에 즉위합니다.
"열세 살에 왕이 된 보두앵 4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애처로운 마음과 함께 이 왕을 모실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보두앵 4세의 정치, 외교, 군사는 이전 왕들 때와 달랐다. 적측에 살라딘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의 효과를 거두게 된 것이다."
-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中
영화 <킹덤 오브 헤븐>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은 십자군 전쟁 중 제3차 십자군 원정의 직전에 벌어진 살라흐 앗 딘의 예루살렘 함락 상황을 시대적 배경으로, 대장장이였던 발리앙이 전쟁에 참여하며 성장하여, 1187년 예루살렘을 살라흐 앗 딘으로부터 지켜내는 과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영화상의 소품이 칼 같은 고증에 따라 만들어졌기로 유명하며 영상미와 유명 영화 음악 작곡가인 해리 그렉슨 윌리엄스가 작곡한 중세풍의 아름다운 사운드트랙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영화상에서의 복장이나 소품의 고증이 뛰어난 나머지 일부는 ‘역사적 고증이 완벽한 영화다.’라는 평도 있는데 이는 다소 무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외적으로 보이는 물적 고증은 높은 수준이지만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이나 가치관 등의 내적 고증은 비판을 받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세세한 외적 고증도 잘못된 부분이 있긴 합니다.) 물론 중세 다큐멘터리가 아닌 감독의 창작물인 영화이기 때문에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 안에서는 고증을 최대한 지켰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역사상의 기록과 영화의 묘사의 차이에 대해 집고 넘어가는 것은 꽤 흥미로운 과정이고 이 글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문둥이왕 보두앵
보두앵4세는 예루살렘의 아모리 1세와 쿠르트네의 아녜스 사이에서 1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9살 때 보두앵은 고통을 잘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신하가 보두앵을 의사에게 데려가니, 보두앵은 심각한 피부병인 나병에 걸렸으며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후 보두앵의 나병은 급속도로 확산되어 몸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보두앵이 문둥이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이유입니다. 영화에서의 대사를 따와 보았습니다.
보두앵 4세: 고프리의 아들을 만나서 반갑군.
그는 나의 위대한 스승님들 중 한 분이었지.
그는 거기에 있었어, 내가 다른 아이들과 놀다가 팔을 베이게 되었을 때.
그였지, 내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걸 눈치챘던 건, 아버지의 의사들이 아니라
그는 울었어, 내가 문둥이라는 소식을 내 아버지께 전했을 때
영화 <킹덤 오브 헤븐> 中
위 대사는 영화에서 예루살렘의 국왕인 보두앵 4세가 발리앙을 처음 만났을 때 건네는 말입니다. 보두앵 4세가 친구와 놀다가 팔을 베였는데 그만이 고통을 느끼지 못했었고 이를 알아차려 왕에게 보고한 이가 발리앙의 아버지, 고프리였음을 언급하며 그에 대한 유대감을 내비치는 장면입니다. 이는 발리앙과 보두앵 4세의 사이를 더 가깝게 하기 위한 영화적 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보두앵 4세의 나병증세를 알아차린 것은 발리앙의 아버지가 아니라 당시 아모리 1세의 신하였던 ‘기욤 드 티레’였기 때문입니다. 팔을 베였던 것의 실상도 보두앵4세가 또래 아이와 얼굴을 꼬집는 놀이를 하는 중 고통을 느끼지 않는 행실을 보이자 기욤이 부왕에게 보고했던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영화에서 보두앵 5세 역시 나병 진단을 받아 절망한 시빌라가 독을 써 안락사시킨 것으로 그려지나 이 또한 사실이 아닙니다. 즉위 11년여 만에 요절한 것은 사실이나, 나병으로 죽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극 중에서는 보두앵 5세 역시 외삼촌 보두앵 4세처럼 나병 환자로 그려져서 은연중에 나병이 유전병이라는 뉘앙스를 주고, 비극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보두앵 4세는 영화에서 위와 같은 가면을 쓰고 나오며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는데 실제로 보두앵은 말년에 나병으로 얼굴이 심하게 망가져서 상해 제례 때 쓰는 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공식 석상에 나왔다고 합니다. 영화의 가면은 이를 반영한 것입니다.
"나병이 차츰 외모까지 무너뜨리기 시작하자 보두앵 4세는 사람들 앞에 나설 때 은가면을 쓰게 되었다."
-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中
후반부에 보두앵 4세가 죽고 시신이 안치됐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면이 벗겨지는데 코는 다 떨어져 나갔고, 입술 역시 절반 이상이 문드러져 뒤틀린 바람에 이빨이 드러나 있는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빠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한 시빌라는 조용히 다시 가면을 씌워 주고 매무새를 정돈해 줍니다.
보두앵 4세의 인간성
살라딘: 바라건대 기병을 물리시고 이 문제는 나에게 맡기시오.
보두앵 4세: 병사들을 온전히 다마스커스로 돌려보내시기 바라오. 르노 드 샤티용은 반드시 처벌받을 것이오. 내 약속드리오. 철수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 이곳에서 죽을 것이요. (침묵) 받아들이겠소?
살라딘: 알겠소. (침묵, 나병으로 힘들어하는 보두앵 4세) 당신에게 내 주치의를 보내겠소.
보두앵 4세: 살람 알레이쿰(당신에게 평화가 함께하길)
살라딘: 와알레쿰 살람(당신에게도 평화가 있길)
영화 <킹덤 오브 헤븐> 中
우선 영화에서 보두앵 4세는 가혹한 상황에서도 냉철하고 현명한 군주로 나옵니다. 위 장면은 평화 협정 이후에 분쟁이 생기자 살라딘의 군대를 적절한 협상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실제 보두앵 4세는 영화처럼 마냥 온건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즉위 당시 보두앵 4세가 자행했던 일은 다른 예루살렘의 왕들이 했던 것처럼 무슬림 영향권을 공격했던 것이고, 살라흐 앗 딘과의 평화협정도 왕국 내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내린 판단이지,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기독교와 무슬림의 공존을 꿈꾸고 내린 결정도 아니었습니다. 무슬림에 대한 비교적 온건적인 태도는 결과적으로 평화협정에 따른 행동이었지, 보두앵 4세가 종교를 초월한 성인군자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성군이 아니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보두앵 4세는 당시 정세와 문둥병을 앓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재위 기간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통치했고 의도야 어쨌든 관용정책과 온건적 통치 방식은 많은 옹호를 받았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보두앵 4세의 통치는 훌륭했지만 너무 짧았다는 평가가 대다수입니다. 다음은 그 덕목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인간세계에는 교활한 인간이 많다. 그런 자질이 그 인물이 이끄는 공동체를 위해 쓰이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쓰이는지 차치하고라도 교활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 많다. 그렇기에 인간은 '외로움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을 보면 감동하는 것이다. 왕국 내의 봉건 영주와 가신과 병사들 모두 예루살렘 왕이 된 보두앵이 나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린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
-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中
또한 보두앵은 극 중에서 계속 누워있는 병약한 군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아픈 몸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할 정도로 용맹한 군주였습니다. 전장에서는 항상 말을 타고 최전선에 섰고, 적이 공격해 와도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병이 악화되었을 때는 안장에 자기 몸을 묶어서라도 지휘를 했다고 합니다.
"보두앵 4세는 죽기 전까지 11년간의 치세 기간 내내 병 때문에 왕궁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슬람의 대군을 적으로 돌려 정면충돌하는 것을 될수록 피한다는 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쪽에도 방어의 기개와 그에 투입할 힘이 있다는 것을 적에게 보여주기 위해,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공격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적이 경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자세야말로 억지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마스쿠스 근처까지 군대를 이끌고 간 적도 있고, 이집트까지 진격한 적도 있었다. 거의 매년 예루살렘을 떠나 출격한 셈이다."
-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中
물론 극중에서는 병이 심하게 악화된 시기인 것을 감안해야 하지만 보두앵 4세가 극중 묘사보다는 상당히 호전적인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군 국가들이 살라딘에게 하나 둘 통일되던 시기, 중동에게 그들은 침입자에 불과할지라도 예루살렘 왕국은 이미 하나의 삶의 터전이자 안식처였습니다. 십자군 전쟁의 피로 얼룩진 왕국들은 역설적이게도 고유의 가치를 가지며 이슬람의 신념과 맞부딪힌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아모리 1세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던 보두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책임감이 강했습니다. 많은 중동의 그리스도인들이 그에게 희망을 걸었지만 어린 나이에 그가 나병에 걸려 버렸음이 밝혀집니다. 그럼에도 13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해 현명한 통치를 이어가며 전장에서는 항상 말을 타고 최전선에 섰고, 적이 공격해 와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등 24살에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예루살렘 왕국을 지켜냅니다. “십자군 왕국은 마지막 순간에 가장 훌륭한 왕을 만났다.” 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닌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이러한 보두앵 4세의 고증은 훌륭했지만 일부 왜곡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현대는 세속주의와 종교적 다원주의를 기본으로 깔고 있어 소위 '중세적 가치'에 너무 충실하기가 쉽지 않고 되려 관객 입장에선 공감이 힘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고증 자체도 자주 희생되는 사극 장르에서 소위 '완벽한 고증'은 못할지라도 물적이라도 이만큼 완성도를 추구했다는 면에서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문헌
- 영화 <킹덤 오브 헤븐>, 20세기 폭스, 리들리 스콧, 2005
-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문학동네, 2011
-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김태권, 비아북, 2003
- 십자군, 토머스 매든, 권영중 역, 루비박스, 2005
- 킹덤 오브 헤븐 – 영화와 실제 역사의 비교, 임정규, 2016.9.29.
- 나무 위키 – 킹덤 오브 헤븐, 보두앵 4세, 기욤 드 트레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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