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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수동적 이상론자들

by 성중 2020. 12. 4.

 

Wating for Godot

 

 

 

사뮈엘 베케트의 대표작이자 부조리극의 대명사, <고도를 기다리며>입니다.

 

 작품의 줄거리는 별거 없습니다. 그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남자가 작은 나무 옆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내용입니다. 딱히 결정적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고도가 누구인지 제대로 설명조차 해주지 않으며 오랜 습관처럼 고도를 기다립니다. 세부적인 내용은 그들이 기다리면서 무엇을 하는지 인데 그것도 별거 없습니다. 둘은 의미 없고 부자연스러운 대화를 끊임없이 주고받을 뿐입니다. 극은 1막, 2막으로 2일간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2019년 국립극단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

 

 

 

 첫 번째 날에는 이상한 점이라고 한다면 둘의 동문서답과 맹목적인 기다림, 의미 없는 행동들 정도입니다. 포조라는 자와 그의 짐꾼 럭키가 지나가고 고도의 심부름꾼이라는 소년이 와 고도가 내일 온다고 이야기해줍니다. 하지만 두 번째 날까지 보면 명백히 이상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전날에 왔던 포조와 럭키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고 소년은 고도가 내일 온다는 말을 되풀이합니다. 하지만 왜인지 둘은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합니다. 이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고도는 오지 않을 것이며 같은 내용이 되풀이될 것을 예상하게 합니다.

 

에스트라공: 나는 이런 짓을 계속할 수 없네.
블라디미르: 그것은 자네 생각이지.

블라디미르: 우린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없네.
에스트라공: 어딜 가도 마찬가지지.
블라디미르: 고고, 그런 소리 말게. 내일이면 다 잘 될 거니까.
에스트라공: 잘 된다고? 왜?
블라디미르: 자네 그 꼬마가 하는 얘기 못 들었나?
에스트라공: 못 들었네.
블라디미르: 그놈이 말하길 고도가 내일 온다는군. 그게 무슨 뜻이겠나?
에스트라공: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지, 뭐.

-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수동적 이상론자들

 중학교 때 스쳐 지나가듯 읽어본 <고도를 기다리며>, 그때 들었던 생각은 '그래서 고도가 누군데?'였습니다. 고도가 '신' 또는 '자유'가 아닐지 생각하며 작품을 읽어봐도 이들의 기다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냥 기억상실증 걸린 사람들이 나오는 이상한 책으로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지금 읽어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도의 정체를 굳이 알아야 할까?' 고도의 정체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른 것일지도 모릅니다. 대선 후보에게는 대통령이 고도일 것이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빵 한 조각이 고도일 것입니다.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작은 틀에 박혀 저는 '고도가 무엇인지만 알게 된다면 해답이 되겠지'같은 생각만 했던 것입니다. 

 

 

블라디미르: 그래. 고도씨는 뭘 하고 있냐? (사이) 내 말 듣고 있는거냐?
소년: 네
블라디미르: 그럼?
소년: 아무것도 안해요.

-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는 각자의 이상 혹은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 다른 그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작중에서 소년은 '고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라고 합니다. 즉, 이상은 저절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직접 찾아갈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고도가 누구인지도, 왜 기다리는지도 알지 못한 채 소년의 말이 헛된 희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고도를 기다립니다. 이것이 제가 그들을 수동적 이상론자들이라 칭한 까닭입니다.  

 

마지막 장면

블라디미르: 자,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그래, 가세.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며
국내도서
저자 :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 / 오증자역
출판 : 민음사 2000.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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