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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역사란 무엇인가」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by 성중 2020. 12. 14.

 때는 대학교 1학년 2학기, 눈에 띄었던 교양과목이 하나 있었습니다. 강의 이름은 '역사란 무엇인가'. 뭔가 이 강의는 저에게 역사의 모든 것을 가르쳐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pc방에 가기 귀찮았던 저는 집에서 수강신청을 시도했고 결국 '역사란 무엇인가'는 제 시간표에서 사라졌으며, 수강신청은 꼭 pc방에서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책장에 책 한 권이 눈에 띄었습니다. 제목은 똑같이 '역사란 무엇인가'. 이번엔 이 책이 저에게 역사의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 같았습니다.

 

 

 

What is History? (1961)

 

 

 <역사란 무엇인가>는 에드워드 헬릿 카(E.H.카)가 역사에 관한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강연을 엮어낸 책입니다. 총 6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서부터 역사의 구조적 인과관계, 그리고 진보로서의 역사를 다룹니다. 내용이 워낙 방대하고 깊이 들어가려 하면 끝이 없는 책이기 때문에 이해한 몇 가지 포인트만 풀어서 정리해 봤습니다.


 역사란 무엇일까요? 그냥 옛날에 있었던 일들이라고 하면 좀 아쉽습니다.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들은 엄밀히 따지면 '옛날에 있었던 일들을 누군가 기록한 것'입니다. 그게 그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실 수 있는데 이 차이를 아는 것이 조금 중요합니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일기를 쓴다고 생각해 봅시다. 눈을 깜빡였다고 해서 '방금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이런 것은 기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철수와 농구를 해서 졌다면 '철수와 농구를 했는데 아쉽게 패배했다.'라고 쓸 것입니다. 반면에 철수는 '오늘 농구를 가볍게 이겼다.'라고 쓸지도 모르죠. 즉, 사실을 기록할 때 무엇을 적을 지, 그리고 어떻게 적을지는 쓰는 사람의 주관에 달린 것이고 이렇게 기록된 것이 우리가 보는 역사인 것입니다.

 

'역사가는 그의 사실들의 비천한 노예도 아니고 난폭한 지배자도 아니다.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 관계이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 E.H.카 <역사란 무엇인가>

 

 이러한 역사의 흐름은 곧 인과관계의 집합입니다. 아이와 대화하면 가끔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땀난다. - 왜요? - 오늘 날씨가 더우니까 - 왜요? - 여름이니까 덥지 - 왜요? - ...' 이 아이는 훌륭한 역사가가 될 것 같습니다. 역사 또한 원인의 연구이기 때문입니다. E.H.카에 따르면 위대한 역사가는 새로운 것, 새로운 맥락 속에서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또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원인들을 일정한 위계질서로 정리하며 의미 있는 범주들을 선택해 더 큰 인과관계로 단순화시킵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역사가의 '선택'입니다.

 

'역사가는 원인들의 목록을 정리하고, 상호 관계를 설정하고, 위계질서를 수립하고, 궁극적인 원인을 결정하고, 연구 결과를 해석해야 한다. ···역사란 역사적 중요성이란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의 과정이다.'

- E.H.카 <역사란 무엇인가>

 

 고등학교때는 역사교과서를 보며 여기 적혀있는 것들은 당연히 고정불변의 진리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E.H.카에 따르면 어떤 사실을 다루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서술하는지는 사회의 가치관을 반영한 역사가의 선택입니다. 그렇기에 역사 교육과정이 계속해서 개정되어 온 것이고 다양한 출판사의 다양한 교과서들이 있으며 더 나아가 <총, 균, 쇠>, <사피엔스>등 혁신적인 관점의 저서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 사실을 왜곡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변하지 않는 과거와 사실들 속에서 시대에 부응하는 보편적으로 유용한 가치를 이끌어 내는 것이 합리적인 역사가의 자세라는 뜻입니다. 또 이렇게 적힌 역사는 후대에 다시 해석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합니다. E.H.카는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칭했습니다.

 

'가치는 (역사의) 사실에 개입하여 그것의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 역사를 진보의 기록으로 만들어온 저 주변 환경에 대한 지배력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우리의 가치를 통해서 마련된다. ···역사에서 진보는 사실과 가치의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성취된다. 객관적인 역사가란 이러한 상호과정을 가장 깊이 통찰하는 역사가인 것이다.'

- E.H.카 <역사란 무엇인가>

 강연을 정리한 책이라 그런지 전체적으로 비판적 사고가 돋보였고 사고의 확장 과정이 상당히 체계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글의 밀도가 높고 생소한 인용이 많아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름 정리해봤지만 글에 핵심적인 내용은 절반도 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역사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한 번쯤 천천히 읽어봐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볍게 읽을 만한 책은 아니지만 역사에 대한 근본적 통찰만큼은 시대를 뛰어넘어 독보적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국내도서
저자 : 에드워드 H. 카(Edward Hallett Carr) / 김택현역
출판 : 까치(까치글방) 2007.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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