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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만화

이토 준지가 리메이크한「인간실격」

by 성중 2020. 12. 28.

 <인간실격>은 일본의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의 대표작이자 자전적 소설입니다. 풍요로운 집안에서 비상한 머리, 잘생긴 외모로 태어났지만 5번의 자살 시도 끝에 생을 마감한 다자이 오사무는 그의 삶을 오바 요조라는 인물의 수기로 소설에 담아냈습니다. 삶의 불안감, 인간의 위선과 가식을 예리하고 섬세하게 표현해 일본에서 '세기의 정서'로 평가받는 <인간실격>을 유명 공포 만화가 이토 준지가 리메이크했고 3권 완결로 국내에서 정발 되었습니다.

 

 

 

 

인간실격 무삭제판

 

 

 

 결말이나 세세한 내용은 원작과 꽤 차이가 있으나 이야기의 큰 흐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이토 준지의 해석이 잘 어우러진 것 같습니다. 주인공의 내적 두려움을 표현하는 장면에선 공포 만화가답게 상당한 작화를 보여주는데 좀 과하지 않나 싶으면서도 작품 분위기를 가장 잘 표현한 것 같기도 합니다. 작가 후기를 보면 호러적 요소를 아슬아슬하게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강조했다고 하는데 확실히 원작을 읽을 때보다 주인공의 내적 공포에 더욱 몰입이 되었습니다. 

 


'부끄러운 생애를 보내왔습니다. 저로서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짐작도 되지 않습니다.'

 

 수기의 첫 문장은 주인공 오바 요조의 삶을 정말 간결하게 요약해줍니다. 명문가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요조는 외모, 출신, 지능 뭐 하나 빠지지 않는 금수저입니다. 하지만 워낙에 세심하고 내향적인 성격이었고 엄격한 집안에서 자라며 이중적인 사람들을 보거나 하인들에게 학대당하는 등 복합적인 이유로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을 가지게 됩니다. 처세술이 뛰어났던 요조는 이러한 공포감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아를 숨기고 우스꽝스러운 광대짓을 시작합니다.

 

 

 

 

광대짓을 하는 요조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제 마지막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어떻게 해도 인간을 제 마음에서 끊어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느다란 끈으로 겨우 인간과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은 필사적인, 그야말로 1000번에 한 번 성공할까 말까 할 정도로 어려운 기회를 잡아햐 하는 위기일발의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中

 

일부러 그랬지?

 요조는 인간 자체에 대한 불신이 있었기에 '존경받는다'라는 것이 '거의 완벽에 가깝게 사람들을 속이다가, 결국 어떤 전지전능한 한 사람에게 간파당해, 산산조각 나고, 죽음보다 더한 망신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광대짓을 통한 연기로 더욱 자신을 숨겼지만 이는 얼마 안가 학급의 외톨이였던 타케이치에게 간파당합니다.

 

 

 

 

광대짓을 간파한 타케이치

 

 

 

 서로를 기만하는 사회를 두려워해 스스로 철저한 가면을 썼지만 이를 비웃으며 손가락질하는 타케이치는 요조에게 있어서 세상이 무너지는 수준의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세상이 뒤집힌 듯 놀랐습니다. 일부러 실패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도 아닌 타케이치가 눈치챌 줄을 생각도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온 세상이 일순간에 지옥의 불길로 떨어져 활활 타오르는 것을 눈앞에서 본 사람마냥 '왁'하는 놀란 소리를 지르며, 동시에 자칫 미칠 것 같은 기분을 필사적으로 억눌렀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겁쟁이는 행복조차도 두려워한다

 이후 일련의 사건들로 인간의 불신과 두려움만 더욱 쌓아간 요조는 술과 담배에 빠져 유곽을 드나들다가 그저 불법이라는 이유로 사회주의 데모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시위에서 도주하고 본가에서도 버림받게 되며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 요조는 비슷한 처지의 카페 여급 쓰네코와 동반자살을 하려 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해 본인만 살아남습니다. 그러던 중 요조는 우연히 담뱃가게 아가씨 요시코를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요조와 요시코

 

 

 

 요시코는 요조의 인간 불신을 꺾을 정도로 무한한 신뢰와 순수함을 보여주고 둘은 결혼하게 됩니다. 요조는 요시코의 신뢰에 의지하며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고 화가의 꿈도 키워 나갑니다. 하지만 어느날 친구 호리키와 술을 마시다 요시코의 외도를 목격하고 다시 한번 큰 충격을 받습니다.

 

'저는 요시코가 더럽혀졌다는 것보다 요시코의 신뢰가 더럽혀졌다는 게 오래오래, 더더욱 살아갈 수 없을 만큼 큰 고뇌의 씨앗이었습니다. 저처럼 그저 쭈뼛거리며 남의 눈치만 살피고 남을 믿는 신뢰의 능력에 금이 간 자에게 요시코의 순결한 신뢰심은 그야말로 아오바 폭포처럼 상쾌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랬던 것이 하룻밤 사이에 누런 구정물로 변해버렸습니다. 저것 좀 보세요. 요시코는 그날 밤부터 제 표정의 찡그림이나 웃음 하나마저도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요조는 자세한 경황도 알아보지 않은 채 불신에 사로잡혀 모르핀에 의존하거나 바람을 피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요시코는 결국 자살하게 되고 요조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들어갑니다. 요조는 병원에서 스스로 '인간실격'이라 평하며 불행도, 행복도 느끼지 못하는 폐인이 된 상태로 수기는 마무리됩니다.

 

인간실격

 타인과 대화하면서 느끼는 묘한 이질감, 이에 반응하듯 튀어나오는 억지스러운 미소. 굳이 의식하지는 않지만 사회는 서로의 불신을 바탕으로 광대짓을 하며 유지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실격>은 단순히 사회부적응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성에 원초적 공포를 느끼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삶을 살아가려 했던, 오바 요조의 고뇌가 담긴 이야기입니다. 세상, 존경심, 친구, 여자, 고향, 부모, 모든 것들의 난해한 악순환은 결국 요조를 인간실격자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누구나 상대를 가식으로 대하거나 그것에 불편함을 느꼈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더 소중한 가치들을 왜곡시키지는 않았지만 요조가 가졌던 한계점 속에서 일부는 나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씁쓸해집니다. 요조가 마음을 열고 단 한 사람에게라도 진심으로 다가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처음으로 요조의 진심을 간파했던 타케이치, 처음으로 연민을 느낀 쓰네코,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요시코, 모두 잠시나마 요조를 구원해 주는가 싶었지만 다시 끝없는 심연으로 들어가는 요조를 보고 있으면 아직도 작가의 고뇌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미지에 대한 모든 권리는 출판사 미우, 小学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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