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예/만화

「데스노트」에 대한 공리주의적 접근

by 성중 2020. 12. 6.

 이름을 쓰면 그 사람이 죽는 노트,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마 섬뜩한 기분이 들어 노트를 어딘가에 버리던가 누군가는 개인적 복수심으로 노트를 사용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여기, 노트를 사용해 모든 범죄자들을 죽인다면 정의로운 세상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한 소년이 있습니다.

 

 

 

 

 

Death Note (2004)

 

 

일본의 만화가 오바 츠구미의 대표작, 데스노트입니다.

 

시놉시스

'데스노트'는 사신들이 인간들을 죽일 때 사용하는 공책으로, 한 인간의 본명과 얼굴을 알아야만 죽일 수 있다. 썩어가는 사신계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사신 류크는 유희에 가까운 목적으로 데스노트를 인간계에 떨어뜨리고, 주인공인 고등학생 야가미 라이토가 우연히 이를 줍게 된다.

데스노트가 진짜로 사람을 죽이는 물건이란 것을 알게 된 라이토는 고뇌하다가, 노트를 세상을 위하여 사용하기로 하고 온 세계의 범죄자들을 죽이기 시작한다. 한편 많은 범죄자들이 비정상적인 이유로 사망하는 사태를 두고 인터폴에서도 회의가 열렸을 때 '세계 최고의 명탐정'이라 불리는 L이 이 사건에 뛰어들 것을 선언하면서 라이토와 L의 추리 두뇌 싸움이 벌어진다.

 어떤 이유던 살인이라는 수단으로 세상을 바꿔 나간다는 것은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관 자체가 범죄로 세상이 타락했다는 설정이고 자신의 이익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노트를 사용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라이토를 단순한 악역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라이토의 손에 죽은 자들은 그에게 대항하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법적으로 살아서 감옥을 나갈 수 없는 자들이었으며, 무죄가 의심되지도 않았습니다. 나름의 정의관을 지키며 결과적으로 범죄율을 대폭 감소시킨 라이토의 심판에는 일정한 정당성과 이해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교과서에 수록된 데스노트

 

 

 

 

 하지만 이 주장은 적어도 두 가지 반박에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우선, 전체적으로 볼 때 범죄자들을 죽여서 얻은 이익이 희생보다 더 컸는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줄어든 범죄율을 고려한다고 해도 그러한 죽음을 인정한다면 살인에 반대하는 기준이 약화되거나, 법을 멋대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늘어나는 등 사회 전체적으로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그 이익이 희생이라는 비용보다 더 크다 하더라도, 사회의 비용이나 이익을 계산하기에 앞서 살인은 용납될 수 없다는 정서가 있습니다. '아무리 범죄자라도 법적 동의도 없이 목숨을 빼앗는다니, 그런 행위는 사회에 이익이 돌아간다 해도 잘못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라이토의 행위에 도덕적 분노를 느꼈다면 아마 후자의 이유일 것입니다. 전자는 도덕이 비용과 이익을 저울질하는 데 달렸다는 공리주의의 전제를 받아들인 입장이고 후자는 옳은 행위를 한다는 것은 결과만을 계산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고방식은 정의를 이해하는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을 고려해 최선의 상황을 도출하는 행위가 옳다는 시각과, 권리에는 사회적 결과를 떠나 존중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는 시각입니다.

 

'도덕은 목숨의 숫자를 세고, 비용과 이익을 저울질하는 문제인가? 아니면 특정한 도덕적 의무와 인권은 워낙 기본적인 덕목이라 그런 계산을 떠나 별도로 존재하는가? 그리고 특정 권리가 그렇게 기본적이라면, 타고난 권리든, 신성한 권리든, 빼앗을 수 없는 권리든, 절대적 권리든 간에, 그것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더불어 그것은 왜 기본 권리인가?
-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벤담의 공리주의

 

 

 

 

Jeremy Bentham(1748~1832)

 

 

 

 

 벤담은 이 문제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는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 쾌락이 고통을 넘어서도록 하여 전반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최고 원칙으로 여기며 오늘날에도 정책 입안, 경제학, 일반 시민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공리(功利, 유용성)'를 극대화하는 라이토의 행위는 옳은 행위입니다. 벤담의 주장은 워낙 단호해 이에 반박할만한 그럴듯한 근거를 찾기 어렵습니다. 범죄자에게도 절대적인 의무나 권리가 있다 해도 그것이 장기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극대화시킨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공리의 원칙에 맞서 싸우려 든다면, 그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그 싸움도 바로 이 원칙 자체에 근거하고 있다. 그의 논증이 무언가를 증명한다면, 그것이 증명하는 바는 공리의 원칙이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이 원칙을 적용했다고 상상하는 사례들에서 이 원칙이 잘못 적용되었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이 지구를 움직이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 그러나 그는 먼저 자신이 딛고 설 또 하나의 지구를 발견해야 할 것이다.'
- 제러미 벤담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대한 서론>中

 

 

 

 

판옵티콘(Panopticon)

 

 

 

 

 벤담은 형벌 정책을 더 능률적이고 인도적으로 개선할 방안을 여럿 제시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판옵티콘(원형 교도소)'인데, 중앙에 감시탑을 설치하고 외곽에 재소자들을 배치해 교도관이 한눈에 재소자들을 감시하도록 만든 건축물입니다. 중심은 어둡게 되어 있어, 재소자들은 교도관을 보기는커녕 존재 여부조차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노트를 가진 라이토가 범죄자들을 감시하는 구조와 매우 유사합니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판옵티콘의 의미를 '수형자가 감시자의 존재와 상관없이 스스로의 행동을 일정하게 통제하도록 강제하는 공간'으로 확장시켰습니다. 즉, 라이토의 심판은 근대 사회의 감시 구조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정의인가?

 

 

 

 

야가미 라이토

 

 

 

 

 분명 라이토는 공리주의에 가까운 신념을 갖고 있지만 인간의 존엄성에 큰 비중을 두지 않으며 모든 도덕적 문제들을 사회의 이익이라는 하나의 저울로 측정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실제로 라이토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 선이나 악으로 갈리기보다는 '정의롭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는 다크나이트' 혹은 '긍정적인 면이 없다곤 못하지만 결국은 사악한 악당' 등으로 복합적입니다.  이런 복잡한 캐릭터성에 대한 논쟁은 작중 사건들과 인물 사이에서도 끊이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라이토가 잡히며 데스노트가 세상에 사라지는 것으로 '라이토는 정의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듯 하다가도 다시 범죄자가 늘어난 세상이나 신격화된 라이토를 추종하는 자들이 존재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끝까지 애매모호한 결말을 그려냅니다. 라이토의 도덕적 딜레마는 독자에게 던져진 질문이고, 대답 또한 온전히 독자의 몫인 것입니다.

 

'노트 하나로 세계를... 인간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 난 내 자신의 이익 따윈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 약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불어넣어 돈벌이를 하는 악당과는 전혀 달라! 사람을 죽이는 일이 범죄란 건 알아. 하지만 이제 그것 외엔 바로 잡을 길이 없어. 언젠가는 틀림없이 정의로운 행동으로 인정받겠지.'
- <데스노트>中 야가미 라이토

'아니요! 당신은 단지 살인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 노트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살인 병기입니다. 당신은 사신과 노트의 힘에 눈이 멀어서 신이 되겠다는 허망한 꿈을 꾸고 있는… 미치광이 대량 살인범. 단지 그것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  <데스노트>中 니아

 

뮤지컬 <데스노트>

 

 

데스노트 Death Note 1
국내도서
저자 : 오바 츠구미(Tsugumi Ohba)
출판 : 대원씨아이(만화/잡지) 2004.10.15
상세보기
참고문헌
- <데스노트>, 오바 츠구미, 2004
-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김영사, 2010
- <벤담 「도덕 및 입법의 원리 서설」>, 정원규,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3
- <감시와 처벌>, 미셸 푸코, 1975
- [만화평론] <데스노트>와 <맨홀>의 비교를 통해 보는 <국민사형투표>, 구구브로, 2015
- 나무위키 – 데스노트, 야가미 라이토 문서
- 뮤지컬 데스노트 MV_Death Note(홍광호), clipservice, https://youtu.be/rrI7tOhoVzA, 2015

'문예 > 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토 준지가 리메이크한「인간실격」  (33) 2020.12.2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