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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싯다르타(Siddhartha) 필사

by 성중 2023. 3. 21.

Siddhartha (1922) @illustimulus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바라보고, 그렇게 미소 짓고, 그렇게 앉고, 그렇게 걸어가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참으로 나 역시 그렇게 바라보고, 그렇게 미소 짓고, 그렇게 앉고, 그렇게 걸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자유롭게, 그렇게 고귀하게, 그렇게 신비롭게, 그렇게 당당하게, 그렇게 천진난만하고 은밀할 수 있으면 좋겠다.' (p.54)

 

'나는 현상계를 착각이라 불렀고, 나의 눈과 혀를 무가치하고 우연한 현상이라고 불렀다. 아니다. 그것은 지나갔다. 이제 나는 깨어났다. 나는 실제로 깨어났고 오늘에야 비로소 태어난 것이다.' (p.60)

 

싯다르타에게는 눈앞에 드리워진 경망스럽고 기만적인 베일에 불과했다. 그래서 믿을 수 없어 보였고, 사고에 의해 채워졌다가 없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체가 아니었고, 본체는 눈에 보이는 세계의 너머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자유로워진 그의 눈은 이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가시적인 것을 보고 인식했고, 이 세상에서 고향을 찾았고, 전처럼 본체를 구하지 않았으며, 피안을 목표로 삼지도 않았다. 구함 없이, 그렇게 단순하게,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관찰하면 세상은 아름다웠다. (p.66)

 

그렇다, 이 사고의 세계 또한 여전히 이 세상이었다. 그래서 감각이라는 우연한 자아를 죽이고, 그 대신 사고와 학식의 우연한 자아를 살찌운다 하더라도,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할 터였다. 사고와 감각, 이 두 가지는 멋진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배후에 궁극의 뜻이 숨겨져 있다. 두 가지는 모두 들어 볼 만한 가치가 있고, 두 가지를 가지고 유희할 만한 가치가 있고, 두 가지를 경시하거나 과대평가하지 않고, 두 가지에서 흘러나오는 심부의 은밀한 음성에 귀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는 이 음성이 뜻을 두라고 자기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에도 뜻을 두려 하지 않았고, 이 음성이 그렇게 하라고 충고하는 곳 이외에는 그 어떤 곳에도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왜 고타마는 일찍이 시간들 중에서도 그 시간에 저 보리수 아래에 정좌하며 각성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는 어떤 음성을 들었던 것이다. 그 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하라고 그에게 명령하는 자기 가슴속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금욕, 제사, 목욕재계나 기도,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잠을 자거나 꿈을 꾸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그 음성에 따랐을 뿐이다. 이처럼 외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오로지 그 음성에만 따르는 것, 그것은 훌륭한 일이었고, 필요한 일이었다. 그 외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p.69)

 

꿈에서 깬 그는 깊은 비통함에 사로잡혔다. 그는 무가치하게, 무가치하고도 무의미하게 삶을 허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 있는 그 무엇도, 어떻든 소중하거나 보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그 무엇도 그의 손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마치 난파당한 사공이 강가에 서 있듯이 외롭고 허전하게 그렇게 서 있었다. (p.112)

 

그가 고향을 떠나 사마나의 생활을 선택했을 때, 그리고 다시 그가 사마나로부터 떠나 그 완성자에게 갔을 때, 그리고 또한 그분을 떠나 불확실한 것 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그 음성을 들었다. 그가 그 음성을 얼마나 오랫동안 듣지 못했고, 얼마나 오랫동안 그 높은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그의 길이 얼마나 평탄하고 황량하게 지나갔던가! 수년 동안 그는 높은 목표도 없이, 갈망도 없이, 비약도 없이, 사소한 쾌락에 안주했지만 결코 한 번도 만족한 적이 없었다! 그 몇 해 동안 그는 스스로 깨닫지 그 많은 사람들, 어린아이 같은 인간들, 소인배와 같은 사람이 되고자 애쓰고 동경했다. 그런데 그때 그의 삶은 그들의 삶보다도 더 비참하고 더 가난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표는 그의 목표가 아니었고, 그들의 걱정은 그의 걱정이 아니었으며, 카마스바미 같은 사람들의 전체 세계는 자기에게는 사실 유희에 불과했고, 구경하는 춤, 희극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카밀라만이 그에게 사랑스럽고 가치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도 여전히 그런가? 그가 아직도 그녀를, 그녀가 그를 필요로 하는가? 그들은 끝없는 유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 때문에 사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필요하지 않다! 이 유희는 윤회라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을 위한 놀이처럼 아마 한 번, 두 번, 열 번 정도는 그런 유희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되풀이한다면 어떨까?

그 때 싯다르타는 유희가 끝났다는 것을, 이런 유희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온몸에 전율이 일었고, 내면의 무엇인가가 죽었다는 것을 그는 느꼈다. (p.114)

 

그가 꿈에서 본 새는 죽어 버렸다. 그 새는 그의 마음속에서도 죽었다. 그는 윤회 속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는 마치 해면이 물을 빨아들이듯, 사방으로부터 구역질과 죽음을 자기 안으로 빨아들였다. 그는 권태로 가득 차 있었고, 비참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죽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는 그를 유혹할 수 있는 것, 즐겁게 할 수 있는 것, 위안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고, 다만 안식을 얻기를, 죽기를 갈망했다. 제발 벼락이 쳐서 죽어버리면 좋으련만! 제발 호랑이가 나타나서 잡아먹혔으면 좋으련만! 술이 있으면, 독약이 있으면, 망각과 잠에 빠질 텐데, 그리고 더 이상 깨어나지 않을 텐데! 대체 나를 더럽히지 못한 불결한 것이 아직 남아있을까? 내가 아직 행하지 않은 죄악이나 어리석은 짓, 내가 아직 짊어지지 않은 마음의 황폐함이 남아 있을까? 그런데도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p.118)

 

오랫동안 그는 자신의 변신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고, 기뻐서 지저귀는 그 새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 새는 그의 내면에서 죽지 않았던가? 그는 자신의 죽음을 느끼지 못했던가? 아니, 다른 무엇인가가 그의 내면에서 죽은 것이다. 이미 오랫동안 죽음을 동경했던 무엇인가가 죽은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일찍이 뜨겁게 참회에 몰입하던 시절에 억제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나? 그것은 그가 그렇게 여러 해 동안 싸워온, 여전히 그를 이기고, 모든 억제 이후에도 다시 남아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금지하고, 두려움을 느끼게 한 그의 자아, 그의 작고, 불안하고 자랑스러운 자아가 아니었던가? 이 사랑스러운 강가의 숲 속에서 오늘 마침내 그 죽음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가 지금 어린아이처럼 그토록 신뢰에 차고, 그토록 두려움도 없이, 그토록 기쁨에 가득한 것은 그 자아의 죽음 때문이 아닐까? (p.133)

 

그는 교만으로 가득했고, 항상 가장 영리한 사람, 가장 열렬한 사람, 항상 누구보다도 한 걸음 앞선 사람, 항상 학식 있는 사람이자 지성적인 사람, 항상 승려이거나 현자였다. 그 승려 계급 안으로, 그 교만 속으로, 그 정신적인 것 안으로 그의 자아가 파고들었고, 그곳에 확고히 자리 잡고 앉아서 자라고 있는 동안, 그는 그 자아를 단식과 참회로 죽일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그것을 알게 되었고, 그 비밀스러운 음성이 옳았다는 사실을, 어떤 스승이라도 어차피 그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세상 속으로 갈 수 밖에 없었고, 쾌락과 권력에, 여자와 돈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고, 장사꾼, 노름꾼, 술꾼과 탐욕자가 될 수 밖에 없었으며, 결국에는 그의 안에서 승려와 사마나가 죽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p.134)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강은 어디서나 동시에 존재한다. 원천에서 그리고 하구에서, 폭포에서, 나루터에서, 여울에서, 바다에서, 산에서, 도처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고, 강에게는 현재만이 존재할 뿐, 과거라는 그림자는 없고, 미래라는 그림자도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배웠을 때, 그제서야 나는 내 삶을 주시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내 삶 또한 하나의 강이었습니다. 그러자 소년 싯다르타는 장년 싯다르타와, 그리고 노년 싯다르타와 단지 그림자에 의해 구분되었을 뿐, 현실적인 것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싯다르타의 전생도 과거가 아니었고, 그의 죽음과 미래가 아니었고, 브라만으로 돌아가는 것도 미래가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현재이며, 모든 것이 본질과 현재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 일체의 번뇌는 시간이 아닌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과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 모두 시간이 아닌가. 그러면 시간을 극복하는 즉시, 시간을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 즉시, 이 세상의 모든 힘든 일, 모든 적대감은 사라지고 극복되는 것 아닌가?" (p.145)

 

실제로 그는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열중하거나 헌신할 수 없었고, 자신을 망각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 수도 없었다. 그는 결코 그런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런 점이 자신을 소인배들과 구별하는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 아들이 나타나고부터, 싯다르타, 그 또한 완전한 소인배가 되어 버렸다. 한 인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한 인간을 사랑하면서, 사랑 때문에 바보가 되는 소인배가 되어 버렸다. 그는 늘그막에 이르러서야 그런 강렬하고 특이한 열정을 느끼게 되었고, 그 열정 때문에 고통과 행복을 느꼈고, 예전보다 조금 더 새로워졌고, 조금 더 풍요로워졌다.

그는 이 사랑이, 자기 아들에 대한 이 맹목적인 사랑이 열정이며,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자, 그런 사랑이야말로 윤회요, 슬픔의 근원이요, 어두운 강물이라고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사랑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며, 그런 사랑은 필연적이며, 그런 사랑은 그 자신의 본질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쾌락도 채우고 싶었고, 그러한 고통을 맛보고 싶었고, 그러한 어리석은 짓을 하고 싶었다. (p.164)

 

그는 이제 예전과는 다르게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덜 현명하고, 덜 오만한 대신에, 더 따뜻하고, 더 호기심을 가지고, 관심 깊게 바라보았다. 평범한 부류의 나그네들, 소인배들, 장사꾼들, 무사들, 부인네들을 건네줄 때에도 그들이 예전처럼 낯설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이해했다. 그는 사고와 분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충동과 욕망에 의해 이끌리는 그들의 삶을 이해했고, 그들의 삶을 함께 나누었다. 그는 그들과 똑같이 느꼈다. 비록 그가 거의 완성에 가까이 다다랐고, 최후의 상처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그러한 소인배들이 형제처럼 여겨졌고, 그들의 허영심, 탐욕,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이 웃음거리가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것, 사랑스럽고 심지어 존경할 만한 것으로 여겨졌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 외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어리석고 맹목적인 자부심, 보석을 갖고 싶어 하고 남자들의 시선을 끌고 싶어 하는 젊고 허영심 많은 여자의 맹목적이고도 거친 본능, 그 모든 충동, 그 모든 유치한 짓들, 단순하고 어리석지만 무섭도록 강렬하고 강한 생명력을 지닌 욕구와 충동이 싯다르타에게는 이제 더 이상 하찮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무한한 것을 행하고, 여행을 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무한한 것에 시달리고, 무한한 것을 견뎌 낸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그런 것 때문에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모든 격정들 속에서, 그들의 모든 행위들 속에서 생명을, 생동하는 것을, 불멸하는 것을, 브라만을 보았다. 그런 인간들은 그들의 맹목적인 충실성 속에, 맹목적인 힘과 끈질김 속에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고 경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지식인이자 사상가인 자기가 그들보다 앞선 것이라고는 사소한 것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사소한 것 한 가지는 의식하고 있다는 것, 모든 생명의 단일성을 의식하여 사유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싯다르타는 심지어 이따금 그러한 지식, 그러한 생각이 그렇게 높이 평가되어야 하는지, 그러한 사상도 혹시 사고하는 인간, 사고하는 소인배의 유치한 짓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생각한다는 것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점에서 세속적인 인간들이 현인인 자기와 대등하고, 종종 자기를 훨씬 능가하는 때도 있었다. 그것은 실제로 짐승들도 불가피한 경우에는 끈질기고 단호한 행동을 한다는 점에서 간혹 인간들을 능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p.175)

 

그 순간 싯다르타는 운명과 싸우기를 그만두었고, 고뇌하는 일도 그만두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의지도 그것에 맞설 수 없는 지혜의 기쁨이 활짝 꽃피어 있었다. 그것은 완성을 알고 있고, 생성의 강, 삶의 큰물과 일치했다는 지혜, 완전히 함께 기뻐하고, 흐름에 몸을 맡기고, 단일성에 속해 있다는 지혜의 즐거움이었다. (p.183)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네.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 전달하려고 해써 봐도 지혜란 언제나 어리석은 생각으로만 들릴 뿐이라네."

"그 사상이란 '모든 진리의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다.'라는 것이네. 말하자면 이렇다네. 진리는 오직 일면적일 때만 언제나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고,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일면적인 것이네. 모든 것은 일면적이고, 모두 다 반쪽일 뿐이며, 모두 다 전체성, 원, 단일성이 결여되어 있네. 그래서 세존 고타마께서 가르치시면서 세상에 대해 말씀하실 때, 세상을 윤회와 열반, 미혹과 진리, 번뇌와 해탈로 나눌 수밖에 없었다네. 달리 어떻게 할 방법이 없네.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길이 없네. 하지만 세계 자체, 우리를 에워싸고 있고, 우리 마음에 내재하고 있는 존재 자체는 결코 일면적이지 않다네." (p.191)

 

모든 죄는 이미 그 자체 안에 자비를 품고 있고, 모든 어린아이는 이미 자기 안에 노인을, 모든 젖먹이는 죽음을, 모든 죽어가는 사람들은 영원한 삶을 지니고 있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선하고, 모든 것이 완전하고, 모든 것이 브라만이라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존재하는 것이 선하게 보이네. 나에게는 죽음이 삶처럼, 죄가 신성함처럼, 지혜는 어리석음처럼 보이네. 모든 것은 그래야만 하며, 모든 것이 오직 나의 동의, 오직 나의 의향만 필요로 하고, 나의 다정한 양해를 필요로 한다네. 그래서 그것은 나에게 좋은 일이라네. (p.192)

 

고빈다는 완성을 이룬 사람들이 이렇게 미소 짓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싯다르타는 잔잔히 미소 지었고, 그윽하고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마치 그분, 세존께서 미소 지으셨던 것과 똑같이 어쩌면 자비롭게, 어쩌면 조롱하듯이 웃고 있었다.

싯다르타의 미소는 고빈다로 하여금 이제까지 삶 가운데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 이제까지 삶 가운데 그에게 가치 있고 신성했던 모든 것을 상기시켰다.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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